조선 조선(朝鮮)[1] 또는 조선국(朝鮮國)은 유교사상[2][3]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한반도를 505년간 지배했던 전제군주국이다. 1392년 7월 17일에 고려의 무관이었던 태조 이성계가 건국하였으며, 1897년 10월에 고종이 칭제건원을 선포하여 세운 대한제국으로 계승되었다. 수도는 한양이었으며, 북부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만주족(옛 여진족)의 만주(현재의 중국)와 연해주(현재의 러시아)의 접경국이였다.Joseon[a] (Korean: 조선; Hanja: 朝鮮; MR: Chosŏn; [tɕo.sʌn]), officially Great Joseon State (대조선국; 大朝鮮國; [tɛ.tɕo.sʌn.ɡuk̚]),[14] was the last dynastic kingdom of Korea, lasting just over 500 years.[15][16] It was founded by Yi Seong-gye in July 1392 and replaced by the Korean Empire in October 1897.[17] The kingdom was founded following the aftermath of the overthrow of Goryeo in what is today the city of Kaesong. Early on, Korea was retitled and the capital was relocated to modern-day Seoul. The kingdom's northernmost borders were expanded to the natural boundaries at the rivers of Amrok and Tuman through the subjugation of the Jurchens. 환조의 아들이자 고려의 신흥 무인 세력이었던 태조는 고려 왕조의 명으로 명나라를 정벌하러 가는 도중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에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그는 창왕·공양왕을 왕위에 올렸다가 신돈의 자식이라고 사건을 조작하여 폐위하는 등 정권·군권·경제권을 행사하였고, 전제 개혁을 단행했다. 1392년 7월 17일(양력 8월 5일)에는 공양왕이 왕대비에게 준 옥새를 이성계가 받아 들어 주변 측근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면서 조선왕조가 시작되었다.[4] 1393년 2월 15일에는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1] 1394년에는 한양을 도읍으로 하여[5] “재상 중심 정치”를 꿈꾸던 정도전을 중심으로 고려의 기존 제도를 급진적으로 고쳤다. 형 정종을 꼭두각시로 세웠다가 곧 왕권을 양위 받은 태조의 아들 이방원(태종)은 특권층이 소유하고 있는 개인 사병들을 강제 해산하여 조선군에 편입하고 호패법을 실시하며 왕권을 대폭 강화하였고, 정도전을 암살한 뒤 관료 제도를 재상 중심 의정부서사제에서 임금 중심인 육조직계제로 개편하였다. 세종대왕은 1443년 집현전을 궁내에 설치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장영실을 등용하여 아들 문종과 함께 과학 발전에 힘썼고, 훈민정음을 창제하며 애민정치를 펼쳤다. 이후 왕위에 오른 단종을 계유정난으로 몰아낸 그의 삼촌 세조는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세력을 제거한 뒤 태종처럼 육조직계제를 채택, 왕권을 강화하였고,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을 짓기도 했다. 단명한 예종에 뒤이어 즉위한 성종은 치국의 근본이 되는 《경국대전》을 편찬하는 등 문물제도를 정비했다.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 세력이 정계에 등장하고 기존 대신인 훈구와 대립하면서 정치는 혼란해졌다. 사림과 훈구를 모두 배척하고 독단적으로 정치를 한 연산군을 중종반정으로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조광조를 중용하는 등 사림 공신에게 휘둘리지 않으려 애를 썼으나, 이렇다 할 치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인종과 명종 역시 사림과 훈구의 공방 속에서 요절했다. 선조 대에 이르러서는 훈구파가 정계에서 물러나고 사림파가 정계를 장악하게 된다. 이후 사림이 붕당을 형성하여 대립각을 세워 붕당 정치가 탄생했다. 200년간 큰 전쟁 없이 평화로이 지내다가 16세기 말에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은 국토가 쑥대밭이 되고, 재정이 바닥났으며,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 서인이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쫓아낸 후, 왕위에 오른 인조는 친명배금 정책을 표방하다가 병자호란이 있었다. 이 양난을 기점으로 유학의 영향력이 공고해지고, 조선의 역사는 후기로 접어든다.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조정에서는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북벌론과 청나라를 본받자는 북학론이 대두되었으나, 효종이 의료사고로 숨지면서 북벌론이 흐지부지되고, 북학론도 여전히 청나라의 여진족들을 비하하는 관료들 때문에 국정에 반영되지 못하였다. 이후 왕위에 오른 현종은 경신대기근에도 불구하고 전쟁으로 고갈된 재정을 수습하고 황폐해진 조선을 복구하며 서인을 견제하는 데 힘을 썼다. 이즈음 붕당이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환국”을 숙종이 빈번하게 일으키면서, 붕당 정치는 견제와 균형을 통한 상호 공존 및 부패 방지라는 원칙은 퇴색되고, 정권을 잡을 때마다 다른 붕당을 모조리 축출하는 일당 전제화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숙종이 총애하던 장희빈의 소생 경종은 소론과 노론의 알력다툼에 지쳐 재위 4년 만에 승하했다. 경종의 아우 영조는 당쟁을 혁파하기 위하여 탕평책을 폈으나 붕당 정치를 완전히 청산하지는 못했고, 오히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임오화변이 일어났다. 이때를 전후하여 서학(→천주교)이 조선 사회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정조 역시 탕평책을 폈을 뿐만 아니라 정약용과 같은 실학자들을 발굴하여 수원 화성을 축성하는 등 개혁 정치를 시도했지만, 1800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후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19세기 순조·헌종·철종 3대에 지속하였다. 이 기간에 조선은 급격한 쇠퇴를 맞이했다. 외척 가문은 왕위 임명에도 손을 대는 등 부정부패 속에서의 절대권력을 누렸다. 그러던 가운데 흥선군 이하응이 풍양 조씨의 대표 조대비와 결탁하여 둘째 아들 명복을 조선 국왕 자리에 올리는데, 그는 고종이다. 고종 즉위 직후 흥선군은 흥선대원군이 되어 고종을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그는 붕당의 근원인 서원을 철폐하고, 외척 가문인 안동 김씨 세력들을 축출하는 등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프랑스와 미국의 통상 요구에는 통상수교 거부정책(→쇄국정책)으로 대응했다. 1873년에 최익현이 흥선대원군을 끌어내렸고, 이로써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나, 고종의 부인인 명성황후가 민씨 일가를 국가 요직에 대거 임명하여 조정을 장악한 뒤 실권자가 되었고, 대외적으로 문호를 개방했다. 명성황후는 임오군란이 일어나 조선 왕조를 위협하자 청나라를 끌여들였고 임오군란 이후에는 청나라는 일방적으로 조선의 종주를 주장하게 되었다. 1876년에는 조선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일본 제국과 체결하였다. 1882년에는 구식 군인들이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고(→임오군란), 1884년에는 김옥균 등이 주도하여 개화 정권을 수립했다가 삼일천하로 끝났다(→갑신정변). 1894년에는 농민 수탈에 저항하여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농민 자치를 추구했고, 이어서는 갑오개혁이 발표되었다. 1895년에 친일파가 일제와 함께 친러파 명성황후를 암살(→을미사변)하자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몰래 아관파천을 감행하여 러시아 주한 공사관에 1년 동안 피신했다. 1897년 11월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이 경운궁의 편액을 덕수궁으로 고쳐 쓰고, 원구단과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조선의 건국 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은 유교를 국시로 삼고 사회 전반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조선은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펴 성리학을 장려하고 상대적으로 불교는 억눌렀으며, 효과적인 중앙집권적 정책을 펴 나가며 국력을 강화시켜 나갔다.[6] 조선은 건국 후 약 200여 년 동안 평화로운 전성기를 맞았는데, 특히 세종 시기에는 문학, 과학, 예술,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났고 조선 문화가 발전하였다.[7] 시간이 지나면서 쇠퇴하였고 이후 쇄국 정책을 피며 해외와의 교류를 차단하였다. 이 때문에 해외에서는 ‘은자의 왕국’이라 불리기도 하였다.[8] 조선 후기에는 예술의 진흥기를 맞았으며, 식량 생산량이 늘어나고 인구가 늘어났다. 그러나 18세기 들어서는 점차 사회계급의 혼란, 조정의 권력다툼, 부정부패, 반란 등으로 그 병폐가 눈에 띌 정도로 심각해졌으며, 19세기 들어서는 민간의 힘이 강력해지고 상대적으로 중앙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면서 국력이 급격하게 하락하기 시작하였다.[9] 국호 한국의 역사 선사 시대 고조선 시대 원삼국 시대 삼국 시대 남북국 시대 후삼국 시대 통일 왕조 시대 근현대 vte 태조 이성계의 어진 조선은 공식 명칭으로 대조선국(大朝鮮國) 또는 조선국(朝鮮國)이라 하였으며, 주로 대조선국을 어보(御寶), 국서(國書) 등에 사용하였다.[10][11] 흔히 조선(朝鮮) 또는 조선 왕조(朝鮮王朝), 이씨 조선(李氏朝鮮), 이왕조(李王朝), 이조(李朝), 이왕(李王)라고 부리기도 하였다.[12][13] '대조선국'(大朝鮮國)의 경우 1876년 부산항 조계 조약 체결 당시부터 채택된 국명이며,[10] 그 이전에 공식 석상에서의 정식 국명은 '조선국'(朝鮮國)으로 표기하였다. 역사 이 부분의 본문은 조선의 역사입니다. 조선 (1392~1897년)의 역사는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누며, 전기를 다시 둘로 나눠 전기와 중기로 보아 전기-중기-후기로 보기도 한다. 이때 전기-후기를 나누는 기준은 임진왜란(1592~1598년)이며, 전기-중기-후기를 나누는 기준은 전기와 중기는 중종반정(1506년), 중기와 후기는 1600년도 이후이다. 계해년(1443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正音) 28자(字)를 처음으로 만들어 예의(例義)를 간략하게 들어 보이고 명칭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였다. 사물의 형상을 본떠서 글자를 만들되 고전을 모방하고, 소리로 일곱 가지 음(音)을 맞추었다. 삼극(三極)의 뜻과 이기(二氣)의 오묘함을 모두 포괄하여 28자만으로 전환이 무궁무진하였다. 간략하면서도 요령이 있고 정밀하면서도 막히는데가 없었다. 그런 까닭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반나절이면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게 된다. 이 글자를 가지고 옛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가 있으며, 송사(訟事)를 청단(聽斷)하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가 있게 된다. 자운(字韻)은 청탁(淸濁)을 능히 분별할 수가 있고, 악가(樂歌)는 율려(律呂)가 능히 화합할 수가 있으므로 쓰고 싶은 말을 표현하지 못할 것이 없고, 어디를 가든지 통하지 못할 것이 없어서, 비록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이든지, 닭의 울음소리나 개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 수가 있게 되었다. — 《세종실록》 113권, 세종 28년(1446년) 9월 29일 (갑오) 흠경각(欽敬閣)이 완성되었다. 이는 대호군 장영실(蔣英實)이 건설한 것이나 그 규모와 제도의 묘함은 모두 임금의 결단에서 나온 것이며, 흠경각은 경복궁 침전 곁에 있었다. (중략) 지금 이 흠경각에는 하늘과 해의 돗수와 날빛과 누수 시각이며, 또는 사신(四神)·십이신(十二神)·고인(鼓人)·종인(鍾人)·사신(司辰)·옥녀(玉女) 등 여러 가지 기구를 차례대로 다 만들어서,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저절로 치고 저절로 운행하는 것이 마치 귀신이 시키는 듯하여 보는 사람마다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서 그 연유를 측량하지 못하며, 위로는 하늘 돗수와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으니 이를 만들은 계교가 참으로 기묘하다 하겠다. 또 누수의 남은 물을 이용하여 기울어지는 그릇을 만들어서 하늘 돗수의 차고 비는 이치를 보며, 산 사방에 빈풍도(豳風圖)를 벌려 놓아서 백성들의 농사하는 어려움을 볼 수 있게 하였으니, 이것은 또 앞 세대에는 없었던 아름다운 뜻이다. 임금께서 여기에 항상 접촉하고 생각을 깨우쳐서, 밤낮으로 근심하는 뜻을 곁들였으니, 어찌 다만 성탕(成湯)의 목욕반(沐浴盤)과 무왕의 호유명(戶牖銘)과 같을 뿐이리오. 그 하늘을 본받고 때를 좇음에 흠경하는 뜻이 지극하며 백성을 사랑하고 농사를 중하게 여기시니, 어질고 후한 덕이 마땅히 주나라와 같이 아름답게 되어 무궁토록 전해질 것이다. — 《세종실록》 80권, 세종 20년(1438년) 1월 7일 (임진)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임금의 직책은 오로지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금 백성의 굶주려 죽는 것이 이와 같은데, 차마 여러 도에서 바치는 반찬을 받을 수 있는가? 전에 흉년으로 인하여 이미 하삼도에서 바치는 반찬을 없애고, 오직 경기 · 강원 두 도만 없애지 않았었는데, 지금 듣자니 경기에도 굶주려 죽는 자가 또한 많다니, 내가 몹시 부끄럽다. 두 도에서 바치는 반찬도 아울러 없애는 것이 어떠한가." — 《세종실록》 76권, 세종 19년(1437년) 1월 22일 (임자)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노인으로서 천한 자는 양로연(養老宴)에 나오지 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양로(養老)하는 까닭은 그 늙은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고, 그 높고 낮음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니, 비록 지천(至賤)한 사람이라도 모두 들어와서 참예하게 하고, 그 장죄(贓罪)를 범하여 죄를 입어 자자(刺字)한 자는 참예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 《세종실록》 57권, 세종 14년(1432년) 8월 17일 (계묘) 세종대왕 시책문 삼가 생각하건대, 황고 대왕(皇考大王)께서는 제성(齊聖) 광연(廣淵)하시고 총명 예지(睿智)하시어 처음부터 끝까지 학문을 바탕으로 정치하는 근원을 깊이 연구하고, 밤이나 낮이나 정성을 다하여 정치하는 방도를 넓혔습니다. 유학을 숭상하고 덕화(德化)를 일으켰으며, 농사를 권장하고 형옥(刑獄)을 가엾게 여기었습니다. 조(祖)를 높이고 종(宗)을 공경하는 정성을 다하고, 사대와 교린의 도리를 다하였습니다. 구족(九族)은 실로 인륜을 돈독히 하는 일에 한결 같았고, 조민(兆民)은 태평한 정치에 다 포용되었습니다. 예절이 갖추어지고 풍악이 조화되니, 문치(文治)는 해와 달처럼 빛나고, 가까운 곳이 편안하고 먼 곳이 엄숙하니 위무(威武)는 풍정(風霆)처럼 떨쳤습니다. 이웃 나라에서는 두려워하며 사랑하는 정성을 바치고, 중국에서는 칭찬하고 권애(眷愛)하는 은총을 베풀었습니다. 좋은 상서가 자주 응하고, 칭송의 소리가 번갈아 일어 났습니다. 과연 30년간 태평의 성대이요, 진실로 천 년 사이에 만나기 어려운 행운입니다. 바야흐로 아버지께 만세(萬歲)까지 계실 것을 믿었는데, 어찌 하늘이 하루 아침에 무너질 줄을 생각하였겠습니까? 부비(付卑)의 어려움을 길이 생각하니, 호곡(號哭) 벽용(擗踴) 하는 슬픔을 견딜 수 없습니다. 이에 추숭하는 전(奠)을 거행하여, 애모하는 마음을 조금 펴려고 합니다. 삼가 옥책을 받들어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란 존시(尊諡)와 ‘세종(世宗)’이란 묘호를 올립니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선왕의 영령[懿靈]은 깊은 감찰(鑑察)을 내리셔서 빛나는 옥책을 받으시어 대대로 영구히 전하는 큰 명성[(鴻名]을 누리고, 큰 복록(純禧)을 거듭 주셔서 무궁한 보조(寶祚)를 말없이 도와주소서.
조선
조선(朝鮮)[1] 또는 조선국(朝鮮國)은 유교사상[2][3]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한반도를 505년간 지배했던 전제군주국이다. 1392년 7월 17일에 고려의 무관이었던 태조 이성계가 건국하였으며, 1897년 10월에 고종이 칭제건원을 선포하여 세운 대한제국으로 계승되었다. 수도는 한양이었으며, 북부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만주족(옛 여진족)의 만주(현재의 중국)와 연해주(현재의 러시아)의 접경국이였다.Joseon[a] (Korean: 조선; Hanja: 朝鮮; MR: Chosŏn; [tɕo.sʌn]), officially Great Joseon State (대조선국; 大朝鮮國; [tɛ.tɕo.sʌn.ɡuk̚]),[14] was the last dynastic kingdom of Korea, lasting just over 500 years.[15][16] It was founded by Yi Seong-gye in July 1392 and replaced by the Korean Empire in October 1897.[17] The kingdom was founded following the aftermath of the overthrow of Goryeo in what is today the city of Kaesong. Early on, Korea was retitled and the capital was relocated to modern-day Seoul. The kingdom's northernmost borders were expanded to the natural boundaries at the rivers of Amrok and Tuman through the subjugation of the Jurchens.
환조의 아들이자 고려의 신흥 무인 세력이었던 태조는 고려 왕조의 명으로 명나라를 정벌하러 가는 도중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에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그는 창왕·공양왕을 왕위에 올렸다가 신돈의 자식이라고 사건을 조작하여 폐위하는 등 정권·군권·경제권을 행사하였고, 전제 개혁을 단행했다. 1392년 7월 17일(양력 8월 5일)에는 공양왕이 왕대비에게 준 옥새를 이성계가 받아 들어 주변 측근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면서 조선왕조가 시작되었다.[4] 1393년 2월 15일에는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1] 1394년에는 한양을 도읍으로 하여[5] “재상 중심 정치”를 꿈꾸던 정도전을 중심으로 고려의 기존 제도를 급진적으로 고쳤다.
형 정종을 꼭두각시로 세웠다가 곧 왕권을 양위 받은 태조의 아들 이방원(태종)은 특권층이 소유하고 있는 개인 사병들을 강제 해산하여 조선군에 편입하고 호패법을 실시하며 왕권을 대폭 강화하였고, 정도전을 암살한 뒤 관료 제도를 재상 중심 의정부서사제에서 임금 중심인 육조직계제로 개편하였다. 세종대왕은 1443년 집현전을 궁내에 설치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장영실을 등용하여 아들 문종과 함께 과학 발전에 힘썼고, 훈민정음을 창제하며 애민정치를 펼쳤다. 이후 왕위에 오른 단종을 계유정난으로 몰아낸 그의 삼촌 세조는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세력을 제거한 뒤 태종처럼 육조직계제를 채택, 왕권을 강화하였고,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을 짓기도 했다. 단명한 예종에 뒤이어 즉위한 성종은 치국의 근본이 되는 《경국대전》을 편찬하는 등 문물제도를 정비했다.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 세력이 정계에 등장하고 기존 대신인 훈구와 대립하면서 정치는 혼란해졌다. 사림과 훈구를 모두 배척하고 독단적으로 정치를 한 연산군을 중종반정으로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조광조를 중용하는 등 사림 공신에게 휘둘리지 않으려 애를 썼으나, 이렇다 할 치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인종과 명종 역시 사림과 훈구의 공방 속에서 요절했다. 선조 대에 이르러서는 훈구파가 정계에서 물러나고 사림파가 정계를 장악하게 된다. 이후 사림이 붕당을 형성하여 대립각을 세워 붕당 정치가 탄생했다.
200년간 큰 전쟁 없이 평화로이 지내다가 16세기 말에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은 국토가 쑥대밭이 되고, 재정이 바닥났으며,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 서인이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쫓아낸 후, 왕위에 오른 인조는 친명배금 정책을 표방하다가 병자호란이 있었다. 이 양난을 기점으로 유학의 영향력이 공고해지고, 조선의 역사는 후기로 접어든다.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조정에서는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북벌론과 청나라를 본받자는 북학론이 대두되었으나, 효종이 의료사고로 숨지면서 북벌론이 흐지부지되고, 북학론도 여전히 청나라의 여진족들을 비하하는 관료들 때문에 국정에 반영되지 못하였다.
이후 왕위에 오른 현종은 경신대기근에도 불구하고 전쟁으로 고갈된 재정을 수습하고 황폐해진 조선을 복구하며 서인을 견제하는 데 힘을 썼다. 이즈음 붕당이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환국”을 숙종이 빈번하게 일으키면서, 붕당 정치는 견제와 균형을 통한 상호 공존 및 부패 방지라는 원칙은 퇴색되고, 정권을 잡을 때마다 다른 붕당을 모조리 축출하는 일당 전제화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숙종이 총애하던 장희빈의 소생 경종은 소론과 노론의 알력다툼에 지쳐 재위 4년 만에 승하했다. 경종의 아우 영조는 당쟁을 혁파하기 위하여 탕평책을 폈으나 붕당 정치를 완전히 청산하지는 못했고, 오히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임오화변이 일어났다. 이때를 전후하여 서학(→천주교)이 조선 사회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정조 역시 탕평책을 폈을 뿐만 아니라 정약용과 같은 실학자들을 발굴하여 수원 화성을 축성하는 등 개혁 정치를 시도했지만, 1800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후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19세기 순조·헌종·철종 3대에 지속하였다. 이 기간에 조선은 급격한 쇠퇴를 맞이했다. 외척 가문은 왕위 임명에도 손을 대는 등 부정부패 속에서의 절대권력을 누렸다. 그러던 가운데 흥선군 이하응이 풍양 조씨의 대표 조대비와 결탁하여 둘째 아들 명복을 조선 국왕 자리에 올리는데, 그는 고종이다. 고종 즉위 직후 흥선군은 흥선대원군이 되어 고종을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그는 붕당의 근원인 서원을 철폐하고, 외척 가문인 안동 김씨 세력들을 축출하는 등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프랑스와 미국의 통상 요구에는 통상수교 거부정책(→쇄국정책)으로 대응했다. 1873년에 최익현이 흥선대원군을 끌어내렸고, 이로써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나, 고종의 부인인 명성황후가 민씨 일가를 국가 요직에 대거 임명하여 조정을 장악한 뒤 실권자가 되었고, 대외적으로 문호를 개방했다. 명성황후는 임오군란이 일어나 조선 왕조를 위협하자 청나라를 끌여들였고 임오군란 이후에는 청나라는 일방적으로 조선의 종주를 주장하게 되었다. 1876년에는 조선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일본 제국과 체결하였다. 1882년에는 구식 군인들이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고(→임오군란), 1884년에는 김옥균 등이 주도하여 개화 정권을 수립했다가 삼일천하로 끝났다(→갑신정변). 1894년에는 농민 수탈에 저항하여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농민 자치를 추구했고, 이어서는 갑오개혁이 발표되었다.
1895년에 친일파가 일제와 함께 친러파 명성황후를 암살(→을미사변)하자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몰래 아관파천을 감행하여 러시아 주한 공사관에 1년 동안 피신했다. 1897년 11월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이 경운궁의 편액을 덕수궁으로 고쳐 쓰고, 원구단과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조선의 건국 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은 유교를 국시로 삼고 사회 전반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조선은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펴 성리학을 장려하고 상대적으로 불교는 억눌렀으며, 효과적인 중앙집권적 정책을 펴 나가며 국력을 강화시켜 나갔다.[6] 조선은 건국 후 약 200여 년 동안 평화로운 전성기를 맞았는데, 특히 세종 시기에는 문학, 과학, 예술,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났고 조선 문화가 발전하였다.[7] 시간이 지나면서 쇠퇴하였고 이후 쇄국 정책을 피며 해외와의 교류를 차단하였다. 이 때문에 해외에서는 ‘은자의 왕국’이라 불리기도 하였다.[8]
조선 후기에는 예술의 진흥기를 맞았으며, 식량 생산량이 늘어나고 인구가 늘어났다. 그러나 18세기 들어서는 점차 사회계급의 혼란, 조정의 권력다툼, 부정부패, 반란 등으로 그 병폐가 눈에 띌 정도로 심각해졌으며, 19세기 들어서는 민간의 힘이 강력해지고 상대적으로 중앙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면서 국력이 급격하게 하락하기 시작하였다.[9]
국호
한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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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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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vte
태조 이성계의 어진
조선은 공식 명칭으로 대조선국(大朝鮮國) 또는 조선국(朝鮮國)이라 하였으며, 주로 대조선국을 어보(御寶), 국서(國書) 등에 사용하였다.[10][11] 흔히 조선(朝鮮) 또는 조선 왕조(朝鮮王朝), 이씨 조선(李氏朝鮮), 이왕조(李王朝), 이조(李朝), 이왕(李王)라고 부리기도 하였다.[12][13]
'대조선국'(大朝鮮國)의 경우 1876년 부산항 조계 조약 체결 당시부터 채택된 국명이며,[10] 그 이전에 공식 석상에서의 정식 국명은 '조선국'(朝鮮國)으로 표기하였다.
역사
<nowiki /> 이 부분의 본문은 조선의 역사입니다.
조선 (1392~1897년)의 역사는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누며, 전기를 다시 둘로 나눠 전기와 중기로 보아 전기-중기-후기로 보기도 한다. 이때 전기-후기를 나누는 기준은 임진왜란(1592~1598년)이며, 전기-중기-후기를 나누는 기준은 전기와 중기는 중종반정(1506년), 중기와 후기는 1600년도 이후이다.
계해년(1443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正音) 28자(字)를 처음으로 만들어
예의(例義)를 간략하게 들어 보이고 명칭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였다.
사물의 형상을 본떠서 글자를 만들되 고전을 모방하고, 소리로 일곱 가지 음(音)을 맞추었다.
삼극(三極)의 뜻과 이기(二氣)의 오묘함을 모두 포괄하여 28자만으로 전환이 무궁무진하였다.
간략하면서도 요령이 있고 정밀하면서도 막히는데가 없었다.
그런 까닭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반나절이면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게 된다.
이 글자를 가지고 옛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가 있으며,
송사(訟事)를 청단(聽斷)하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가 있게 된다.
자운(字韻)은 청탁(淸濁)을 능히 분별할 수가 있고, 악가(樂歌)는 율려(律呂)가 능히 화합할 수가 있으므로
쓰고 싶은 말을 표현하지 못할 것이 없고, 어디를 가든지 통하지 못할 것이 없어서,
비록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이든지, 닭의 울음소리나 개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 수가 있게 되었다.
— 《세종실록》 113권,
세종 28년(1446년) 9월 29일 (갑오)
흠경각(欽敬閣)이 완성되었다.
이는 대호군 장영실(蔣英實)이 건설한 것이나 그 규모와 제도의 묘함은 모두 임금의 결단에서 나온 것이며,
흠경각은 경복궁 침전 곁에 있었다.
(중략)
지금 이 흠경각에는 하늘과 해의 돗수와 날빛과 누수 시각이며,
또는 사신(四神)·십이신(十二神)·고인(鼓人)·종인(鍾人)·사신(司辰)·옥녀(玉女) 등 여러 가지 기구를 차례대로 다 만들어서,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저절로 치고 저절로 운행하는 것이 마치 귀신이 시키는 듯하여
보는 사람마다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서 그 연유를 측량하지 못하며,
위로는 하늘 돗수와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으니 이를 만들은 계교가 참으로 기묘하다 하겠다.
또 누수의 남은 물을 이용하여 기울어지는 그릇을 만들어서 하늘 돗수의 차고 비는 이치를 보며,
산 사방에 빈풍도(豳風圖)를 벌려 놓아서 백성들의 농사하는 어려움을 볼 수 있게 하였으니,
이것은 또 앞 세대에는 없었던 아름다운 뜻이다.
임금께서 여기에 항상 접촉하고 생각을 깨우쳐서, 밤낮으로 근심하는 뜻을 곁들였으니,
어찌 다만 성탕(成湯)의 목욕반(沐浴盤)과 무왕의 호유명(戶牖銘)과 같을 뿐이리오.
그 하늘을 본받고 때를 좇음에 흠경하는 뜻이 지극하며 백성을 사랑하고 농사를 중하게 여기시니,
어질고 후한 덕이 마땅히 주나라와 같이 아름답게 되어 무궁토록 전해질 것이다.
— 《세종실록》 80권,
세종 20년(1438년) 1월 7일 (임진)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임금의 직책은 오로지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금 백성의 굶주려 죽는 것이 이와 같은데, 차마 여러 도에서 바치는 반찬을 받을 수 있는가?
전에 흉년으로 인하여 이미 하삼도에서 바치는 반찬을 없애고,
오직 경기 · 강원 두 도만 없애지 않았었는데,
지금 듣자니 경기에도 굶주려 죽는 자가 또한 많다니, 내가 몹시 부끄럽다.
두 도에서 바치는 반찬도 아울러 없애는 것이 어떠한가."
— 《세종실록》 76권,
세종 19년(1437년) 1월 22일 (임자)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노인으로서 천한 자는 양로연(養老宴)에 나오지 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양로(養老)하는 까닭은 그 늙은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고,
그 높고 낮음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니,
비록 지천(至賤)한 사람이라도 모두 들어와서 참예하게 하고,
그 장죄(贓罪)를 범하여 죄를 입어 자자(刺字)한 자는 참예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 《세종실록》 57권,
세종 14년(1432년) 8월 17일 (계묘)
세종대왕 시책문
삼가 생각하건대,
황고 대왕(皇考大王)께서는 제성(齊聖) 광연(廣淵)하시고 총명 예지(睿智)하시어
처음부터 끝까지 학문을 바탕으로 정치하는 근원을 깊이 연구하고,
밤이나 낮이나 정성을 다하여 정치하는 방도를 넓혔습니다.
유학을 숭상하고 덕화(德化)를 일으켰으며, 농사를 권장하고 형옥(刑獄)을 가엾게 여기었습니다.
조(祖)를 높이고 종(宗)을 공경하는 정성을 다하고, 사대와 교린의 도리를 다하였습니다.
구족(九族)은 실로 인륜을 돈독히 하는 일에 한결 같았고,
조민(兆民)은 태평한 정치에 다 포용되었습니다.
예절이 갖추어지고 풍악이 조화되니, 문치(文治)는 해와 달처럼 빛나고,
가까운 곳이 편안하고 먼 곳이 엄숙하니 위무(威武)는 풍정(風霆)처럼 떨쳤습니다.
이웃 나라에서는 두려워하며 사랑하는 정성을 바치고,
중국에서는 칭찬하고 권애(眷愛)하는 은총을 베풀었습니다.
좋은 상서가 자주 응하고, 칭송의 소리가 번갈아 일어 났습니다.
과연 30년간 태평의 성대이요, 진실로 천 년 사이에 만나기 어려운 행운입니다.
바야흐로 아버지께 만세(萬歲)까지 계실 것을 믿었는데,
어찌 하늘이 하루 아침에 무너질 줄을 생각하였겠습니까?
부비(付卑)의 어려움을 길이 생각하니, 호곡(號哭) 벽용(擗踴) 하는 슬픔을 견딜 수 없습니다.
이에 추숭하는 전(奠)을 거행하여, 애모하는 마음을 조금 펴려고 합니다.
삼가 옥책을 받들어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란 존시(尊諡)와
‘세종(世宗)’이란 묘호를 올립니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선왕의 영령[懿靈]은 깊은 감찰(鑑察)을 내리셔서 빛나는 옥책을 받으시어
대대로 영구히 전하는 큰 명성[(鴻名]을 누리고, 큰 복록(純禧)을 거듭 주셔서
무궁한 보조(寶祚)를 말없이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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